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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노동자에게도 위험성평가를

작성자 관리자 조회 20회 작성일 26-10-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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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메뉴를 고르고 버튼 몇 번만 누르면 음식이 문 앞에 도착한다. 전날 밤 주문한 생필품은 다음 날 아침 현관에 놓여 있고, 술자리가 끝나면 대리운전 기사가 차를 집까지 몰아준다. 너무 익숙해서 고마움조차 잊기 쉬운 풍경이다. 그런데 이 편리함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은 지금 안전하게 일하고 있을까. 도로 위 이동노동자들은 교통사고의 위험만 안고 있지 않다. 긴 노동시간과 빠듯한 배송·운행시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하루, 다치면 곧바로 끊기는 수입까지 함께 짊어지고 있다. “조심해서 다녀라”는 당부만으로는 이 무게를 덜어줄 수 없다.


천안시비정규직지원센터는 올해 6월부터 7월까지 배달라이더, 택배기사, 대리운전기사 100명을 대상으로 ‘천안시 이동노동자 안전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의 51%가 최근 1년 사이 일하다 사고를 겪었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다. 사고의 80%는 교통사고였고, 사고를 겪은 이들 가운데 59%는 그 뒤로 소득이 끊겼다. 하루 10시간 넘게 일한다는 응답은 57%, 수면 부족을 겪는다는 응답은 84%였다.

구조적 위험, 시간에 쫓겨 쉴 틈 없이 일한다

더 눈여겨볼 숫자는 따로 있다. 응답자의 63%가 교통법규를 지키면 수입이 줄어든다고 답했다. 안전하게 일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뜻이다. 시간에 쫓겨 휴식을 포기한다는 응답은 52%였지만, 쉼터를 이용해 본 사람은 13%에 그쳤다. 개인 보호장비 착용률은 92%로 높았다. 그런데도 안전관리 수준이 충분하다고 본 사람은 22%뿐이었다. 노동자 개인이 할 수 있는 조심은 이미 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고를 운이 나빠 생긴 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노동시간과 쫓기듯 일하는 방식, 쉴 틈 없는 여건이 맞물려 만들어 낸 구조적 위험일 수 있다.

구조적 위험은 사고가 난 뒤 보상하는 것만으로는 줄어들지 않는다.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을 찾아내고 줄이는 것, 곧 예방이 먼저다. 그 핵심 수단이 위험성평가다. 일하는 과정에 숨어 있는 유해·위험요인을 찾고, 그 위험이 얼마나 큰지 따져본 뒤 개선대책을 세우는 일이다. 문제는 이동노동자에게 정해진 작업장이 없다는 점이다. 도로와 골목, 고객의 집 앞, 주차장까지 일터가 끊임없이 바뀐다. 날씨와 교통상황, 그날의 물량과 배차방식에 따라 위험의 모습도 달라진다. 공장이나 사무실처럼 고정된 작업장을 전제로 한 방식으로는 이 위험을 다 담아내기 어렵다.

평가를 누가 할 것인가도 문제다.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으로 특수형태근로종사자와 배달종사자가 보호 대상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동노동자는 누가 안전 의무를 져야 하는지 특정하기 어려워 여전히 사각지대가 넓다. 의무를 질 사업주가 분명하지 않으니, 위험성평가를 해야 할 주체도 비어 있는 셈이다. 이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지자체다. 지자체는 지역의 도로와 교통, 쉼터와 보건 인프라를 가장 잘 알고 업계 협회와 플랫폼 기업, 노동자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지자체가 평가를 주도하고 협회·플랫폼과 협의해 함께 수행하는 방식이라면, 법이 정비되기 전에도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법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현장의 사고는 멈추지 않는다.

지자체가 수행하는 위험성평가의 출발점은 업종마다 위험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배달라이더에게는 빠듯한 배달시간과 야간·빗길 운행, 교통사고가 먼저 살펴야 할 위험이다. 택배기사에게는 쉼 없이 반복되는 상하차와 무거운 짐이 남기는 어깨·허리 부담이 있다. 대리운전기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노동과 수면 부족, 고객의 폭언·폭행, 그리고 일을 마친 뒤 안전하게 집에 돌아가는 문제까지 안고 있다. 업종별로 위험요인을 따로 조사해야 어떤 장비와 지원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가 직접 평가에 참여해 개선방안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현장의 위험은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장 잘 안다. 위험성평가가 서류 한 장 채우는 절차로 끝나서는 안 되고, 실제 일하는 환경을 바꾸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평가 대상에는 플랫폼이 일감을 배정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시간 압박도 포함돼야 한다. 토론회에 나온 한 배달대행사 대표는 건당 3천원대 중반이던 배달 단가가 이제 900원~1천400원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전했다. 단가가 떨어지면 같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이,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안전수칙을 아무리 가르쳐도 한계가 있다. 부담이 가장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도 문제다. 택배 현장에서는 법정 위험성평가와 고용·산재보험료 부담이 원청이 아닌 대리점에 쏠린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자체가 플랫폼 운영을 직접 규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평가를 통해 배차방식과 단가, 업무량이 안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드러내고, 민관 협의와 개선 권고로 사업자와 플랫폼 기업이 개선에 나서도록 요구할 수는 있다.

지자체 조례로 위험성평가와 실태조사 정례화를

평가는 결과를 정책으로 옮길 때 의미가 생긴다. 지자체는 이동노동자와 플랫폼 기업, 경찰, 전문가가 함께하는 협의체를 꾸려 사고 유형을 분석하고, 업종별 위험성평가 시범사업부터 시작할 수 있다. 평가 결과는 업종에 맞는 안전장비 지원과 이륜차 안전점검, 폭염·한파 대응, 보건소와 연계한 건강관리로 이어져야 한다. 쉼터도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지자체 차원에서 편의점 쉼터 확대가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갑다. 다만 이용률이 13%에 그친 이유,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사업이 중단된 이유부터 살펴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심야 시간대에 가까운 쉼터 위치를 시 홍보 전광판으로 알리는 것처럼,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정보를 전하는 일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사고 이후의 보호체계도 예방과 함께 갖춰야 한다. 산재보험에 어떻게 가입하고 청구하는지 몰라 헤매거나, 치료받느라 일을 쉬는 동안 생계가 막막해지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사고를 겪은 이들의 59%가 소득 단절을 겪었다는 조사 결과가 그 절박함을 보여준다. 산재 상담과 권리구제, 치료 연계, 소득 단절에 대한 지원 정보를 한곳에서 안내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아프면 쉬고 치료받을 권리는 복지 차원의 배려가 아니다. 안전한 노동환경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지자체의 위험성평가가 한 번 하고 끝나는 사업이 되지 않으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지자체는 이동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권익을 아우르는 조례를 마련하고 위험성평가와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 드러났는지, 개선조치는 얼마나 이뤄졌는지, 노동자의 안전이 실제로 나아졌는지를 꾸준히 살펴야 한다. 그 결과가 예산과 다음 해 사업에 반영되는 구조 까지 갖춰야 정책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현장을 바꿀 수 있다.

이동노동자의 안전은 일부 노동자만의 특별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누리는 편리함에 따라오는 공동의 책임이다. 고용형태가 다양하고 일하는 곳이 흩어져 있다는 이유로 안전보건 정책의 사각지대가 계속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난 뒤에야 피해를 헤아리는 사회에서,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을 찾아 줄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지자체가 이동노동자 위험성평가에 나서는 것이 그 변화의 출발점이다.

토론회에서 한 택배대리점 대표는 시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조금 늦더라도 기사님들께 따뜻한 말 한마디 부탁드린다.” 제도가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조금 늦은 배송을 기다려 주는 마음은 오늘부터 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아프면 치료받고, 사고가 난 뒤에도 생계를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 한 걸음 가까워질 것이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s://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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